사실 선생님도 인간이겠지요. 소명감으로 해야 하는 몇몇 직업들 – 의사나 선생님같은 직업들이 있긴 하지만 소명감만으로 가지고 가기에는 모두가 성인(聖人)이 아닌지라 개인적인 욕구나 감정들을 모두 숨길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제리에서 망명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교사란 직업에 취업한 라자르가 아마 예의를 가르키긴 하지만 순간 학생의 뒷통수를 날리는 ‘짓’도 서슴치않고 할 수 있었겠지요.

중요한 것은 소명감으로 내가 무엇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선생님간에 얼마만큼의 감정의 소통이 되고 있는지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공감을 하고 또한 내 삶에 대해 서슴치않고 내보일 수 있는 용기. 맞습니다. 그건 용기일겁니다.

사회에서는 직위나 직분, 재산이나 신분 등에 따라 소통이 때로는 막힐 때가 있습니다. 직위때문에 무엇인가를 계속 일방적으로 전해야 할 것을 강요받기도 하고 어리기때문에 무엇인가를 계속 받아들일 것을 또한 강요받기도 합니다. 사실은 이 둘다에게 모두 스트레스일텐데요. 사회가 주어진 역할에 강제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아마 연극선생님이 계속해서 라자르선생님에게 당신의 삶을 나누어줬냐고 물어보는 것 역시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역할놀이에 푹 빠져서 너무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거죠. 특히나 어른들은 … – 우리나라 옛말에 ‘남진어르다(시집가다)’, ‘겨집어르다(장가가다)’ 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혼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결혼’이란 또 다른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문입니다. 부모와 떨어져 평생 다른 환경의 사람을 만나서 맞춰가는 과정과 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든 것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나가는 과정입니다.즉, 오히려 선입견이 없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품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어린이도, 청년도 아닌 어른들이 가져야 할 역할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들이 권력이 되어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더 어리게 여기거나 진솔한 조언(?)정도를 해줄 따위의 역할로 변해버립니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부모와 아이의 관계 역시도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경험을 알게모르게 어린 사람에게 강요한다거나 내가 부모니까 내 말대로 해야 해, 라는 식의 이야기라면 사실 쓸모없지 않을까요? 내가 살아온 방식은 정말,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 온 삶 중의 하나일 뿐인데 말입니다.

단순히 어린 학생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아이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 – 물론 사회적 경험으로 인한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최소한 그들을 하나의 개체로 인정하고 서로의 삶을 내어놓고 나누는 용기가 정말 필요하지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런, 따스함이 보입니다. 영화에서 또한 그렇게 쉽게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내내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만으로 간직하지만 결국에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라는 걸 아는 것. 라자르 선생님의 용기였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완성체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진행체인거 같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상대의 불완전함이 합쳐져 또 다른 완전함으로 늘, 그리고 항상 진행중인 존재인 거죠. 라자르 역시 자신을 완성된 어른으로서가 아닌, 개체와 개체로서 학생들에게 삶을 나누어줬을 때 그 마지막 장면처럼 비로소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대화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서로의 삐죽삐죽한 모서리를 다듬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옥씨는 그의 저서 ‘대화’에서 대화란 서로의 선입견을 확인하는 것. 이라고도 말했듯이 서로의 자라온 과정 속에서 생채기난 것들이 서로의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아물기도 하면서 다름과 다양성을 하나둘 알아가고 그에 비해 날카로웠던 자신의 가시를 뭉툭하게 만들어가며 그렇게 보듬아 가는 과정이 사람이 사는 삶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