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디자인은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디자인 행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이 의문의 제기가 비교적 강하게 부각되는 사회적 디자인 행위의 키워드를 ‘사유를 위한 디자인’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디자인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디자인을 통해 철학을 할 수도 있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느느 것이다. 요약하면 사유를 위한 디자인은 디자인적 행위를 통해 기존의 사회적 가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디자인의 차원이 다른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디자인의 존재론적인 특성이라고 믿었던 창조성, 심미성, 합리성, 경제성, 표현성 등의 특성만이 과연 디자인의 본질인가를 물어보는 자세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를 위한 디자인은 철학적 자세이며, 디자인의 인식론, 디자인 존재론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 p.74, 박지나, 오주은, 조현신, 『사회적 디자인』, (누하)


책 속에서는 몇 가지 ‘사회적 디자인’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 ‘사유를 위한 디자인’에서는 기존의 디자인의 특성이라고 믿었던 요소들을 과연 디자인의 본질인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런 태도에는 물론 기존에 디자인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윌리엄 모리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즉 좁은 의미의 디자인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회를 위한 수단으로 봤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회의 변혁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현대의 빅터 파파넥과 연결짓고 있다.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유럽 초기 산업시대 디자인 사상가들의 실천이나 디자인 행위가 사회적 디자인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면, 빅터 파파넥은 사회적 디자인의 실천적 토대를 제공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 pp.48~49, 박지나, 오주은, 조현신, 『사회적 디자인』, (누하)


디자인사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모던 디자인의 시작을 산업혁명 시기나 윌리엄 모리스에서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혁명 시기의 윌리엄 모리스와는 다른, 일반적인 상업 디자인들은 어떻게 포괄할 수 있을 것인가? 가 항상 화두가 된다. 이 부분에서는 사람마다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따로 정리해서 포스팅할 예정이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난 번의 ‘김상규, 착한디자인 (안그라픽스)’ 포스팅과의 차이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디자인』이란 책에서는 윌리엄 모리스에서 러시아 구성주의, 빅터 파파넥 등의 일련의 과정들이 이질감이 없다. 그래서 그 결과 급기야는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대 디자인은 그 기원부터가 유토피아를 지향하면서 달려왔고, 디자인적 사고나 행위로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디자인이 스스로의 풍요와 소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위치를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문제 속에서 무언가 더 의미있고 가치 있는 행위자로 설정하였을 때 그들은 스스로의 위상을 달리 설정하였고, 이러한 사회문제 해결자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였다.
– p123, 박지나, 오주은, 조현신, 『사회적 디자인』, (누하)


사실 어떤 면에 있어서 명쾌하다고까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착한 디자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사회문제 해결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왜 엄한 디자인만 잡고 늘어지냐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저자의 논거에 공감하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이 두 책의 차이점을 구별짓는 중요한 지점은 바로 ‘디자인’에 대한 한계 규정이다. 어떤 것을 논하기 전에 그 논하는 대상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만 유독 디자인에 대한 책들을 보게 되면 산업디자인, 공예, 조형, 심지어는 예술에까지 넘나드는 개념을 가지고 혼재되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해는 한다. 왜냐하면 이미 디자인이란 것이 이것 저것 모두 삼켜버린,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같은 존재가 되어서 타 학문에 비해 쉽게 규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디자인의 개념을 계속 규정해나가면서 그 단어의 사용에 엄정함을 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칫 이게 디자인이냐, 저게 디자인이냐 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게 디자인이란 학문으로서 멈추지 말고 해나가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